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 페리고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본래 성직자로, 1788년 오툉의 주교로 임명되었지만,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자 교회 재산의 국유화를 주장하는 등 혁명정부를 지지하였다. 1790년 7월 프랑스 혁명의 기원이었던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기념하는 미사를 거행하자 이에 반발한 천주교회로부터 파문 당했고, 이후 미국으로 망명했다. 1796년 귀국해 총재정부의 외무를 담당하다가 [[나폴레옹]]을 도와 그의 정권 획득과 함께 외무장관에 취임하였다. 오스트리아 및 러시아와 내통하다가 1810년 사임하였으나 그 후 루이 18세의 외무장관, 루이 필리프 정부의 런던 주재 대사로 일하면서 오랫동안 프랑스 외교의 중심에 섰다. 특히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, 유럽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열린 빈 회의에서 프랑스 대표로 참석하여 능수능란한 외교술을 발휘하여 명성을 떨쳤다.이는 나폴레옹 이후 또 다른 단일 패권국가가 등장하여 유럽 질서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꺼리고, 절묘한 세력균형의 형성과 유지를 선호했던 주요 참가국들의 의도를 간파한 결과였다. [[파일:external/www.vienna-unwrapped.com/congress_of_vienna_071-500x330.jpg]] (빈 회의의 풍자도. 그림 맨 오른쪽이 탈레랑. 왼쪽에서 두 번째가 그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[[메테르니히]]이다.) 당시 탈레랑의 활약으로 프랑스는 패전국임에도 불구하고, 영토 재편 과정에서의 손실을 최소화하여 나폴레옹 몰락 이후에도 유럽의 주요 강대국으로 남을 수 있었다. 이후 1838년에 향년 84세로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마감했는데, 죽기 몇 시간 전 과거 자신에게 내려졌던 파문 조치를 용서받으면서 [[종부성사]][* 이 때 손바닥에 성유를 바르는 대신 손등에 바르게 했다고 한다. 상대는 신부였고, 탈레랑 본인은 그래도 '''주교'''였으니까.]를 받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